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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성숙해져 가는 공간

 Artist.Moon Seung-Yeon

누구에게나 감정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다. 봄날에 꽃망울이 터지듯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되는 순간.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탄생한 하나의 감정은 수많은 반복의 과정을 거쳐 마음속 어딘가에서 단단해지고, 충분히 무르익는 순간에는 또 다른 감정과 결합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해가기도 한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해맑게 웃으며 행복하다고만 하던 아이가 자라서는 너무 행복해서 슬프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듯이 말이다.

 

지난 두 번의 전시를 통해  문승연(Moon Seung-Yeon) 작가의 작품 세계에도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곁에 있는 존재들을 표현하고자 했던 마음은 언제나 같았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동물들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첫 번째 전시 <Be With Me>는 이제 막 시작되는 문경아 작가만의 세상을 표면적으로 보여주기에 가장 직접적인 전시였다.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두 번째 전시 <Stay>에서는 그 존재들이 함께 나누는 시간과 그 관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또 그러한 시간 속에서 형성할 수 있는 관계의 무게에 대해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 속 세상을 확장해 나갔다.

 

문승연(Moon Seung-Yeon)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인 <비선형적 시간 : Nonlinear Time>에서는 기존에 있던 시간과 관계의 경계를 넘어 공간으로 그 시선을 옮겨간다. 지난 두 번의 전시 타이틀만 보더라도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와 함께 머무르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 변화는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무의식들이 자연스럽게 이번 전시에서 그들이 머무르며 실존하는 공간으로까지 그 개념을 확장한 것은 아닐까?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보다 꽃들이 만발한 화원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운이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과거보다 존재의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승연(Moon Seung-Yeon)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시간에서 찾고자 했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그 시간마저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의 개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로써, 그녀의 작품 세계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시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에 대한 가능성까지 내포할 수 있게 되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언제든 그 자리에 멈추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들처럼 말이다. 작품 속에 마련된 장소에서는 그 어떤 제약에서도 벗어나 사라져 버린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정지된 것과 정지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세계가 더 넓은 곳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이전에 존재했던 이야기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이번 전시에 또 하나의 가치를 더한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함께 시간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녹아 있다. 이는 우리가 잠시 잊고 지냈던 인간성의 회복과 따스한 온기를 의미한다. 변화도 있다. 과거보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소 어두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전히 까만 밤하늘에는 별빛과 오로라가 빛을 낼 수 있도록 하고, 아직 해가 비치지 않은 새벽 숲 오솔길에는 반짝이는 도토리가 길을 비추도록 만든다. 공간 속에서 성숙해져 가는 감정의 형태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이 조금 달라지고 있을 뿐, 문경아 작가의 세계에는 여전히 서로를 지탱해 주는 따뜻한 마음과 소중한 이를 향한 포근함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의 증거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의 작품 세계가 기존에 반영하고 있던 시간이라는 축에서 공간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축으로 나아간 것은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도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것들 역시 공간을 떠올리면 함께했던 시간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들도 존재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보다는 이제 더 많은 의미를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루고, 선들이 모여 하나의 면을 이루어 가듯이, 작품 속 존재들은 함께 모여 시간을 채우고, 그 시간은 겹겹이 쌓여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 작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모습일 것이다. 작품 세계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고 관객들과 호흡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작가만의 내면의 깊이 또한 성숙해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완성된 작가의 캔버스 위에는 정지되어버린 세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관객들이 이 캔버스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에는 여전히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질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어떤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될까? 작가가 완성해 놓은 시간의 교차로 위에서 그 공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느껴보기 바란다. 토끼굴을 타고 새로운 나라로 향한 앨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진 문경아 작가의 작품 세계 안에서 우리의 시간 역시 그렇게 성숙해져 갈 테니 말이다.

평 론. 조 영 준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것의 의미

 Artist.Moon Seung-Yeon

 

사회의 개념이 확장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하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의 삶은 조금씩 각박해지기 시작했다. 커져버린 세상의 넓이만큼 개인에게 강요되는 것은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멀리 바라보는 것이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이 사회에서 오늘의 안녕을 희생하여 내일을 무사히 버텨내는 것만이 나의 영역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고, 그런 가여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 속의 작고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 커피나 한 잔 해요.” 라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하면서도 정작 나를 위한 잠깐의 여유는 조금도 갖기 힘들다. 퇴근길에 들려오는 짧은 뉴스에 잠시 세상과 마주할 뿐, 오롯한 마음을 담아 주위를 둘러볼 따스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비단 스스로의 힘만으로 쌓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의 소중함 역시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문승연(Moon Seung-Yeon)의 작품 속에는 그렇게 우리가 놓치며 살아왔던 시간의 다양한 속성들이 함축되어 있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할 시간의 회복성은 물론, 우리 주변에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공유하는 이들과의 화합을 위한 공동성,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서로 조금씩 보듬어 나갈 시간의 풍성함까지.. 문경아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의 캔버스 위에 표현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들 속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인간적인 모습의 회복이자 삶에서 필요했을 쉼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 중 하나인 <Lesser Panda>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보이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작품 속 여자 아이는 슬며시 눈을 감은 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소녀는 더 이상 치열한 삶을 견뎌내며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의 왼손 위에는 푸른빛 찻잔 하나가 살포시 얹혀 있다. 이 찻잔은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을 여유로움의 근원이자,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소녀는 그 상상 속에서 ‘랫서 판다’를 만나 그동안 잊고 지냈던 따스함을 전해 받는다. 내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없었고, 타인의 기대에 맞춘 삶을 살던 때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다.

 

<Lesser Panda>에게 역시 그런 소녀는 더 이상 폭력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이 작은 존재의 모습이 밀렵꾼의 모자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씁쓸하게 비쳤을 우리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시간 속에서 소녀와 ‘랫서 판다’는 서로에게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같은 시간을 꿈꾸는 동안 소녀에게는 ‘랫서 판다’와 같은 꼬리가 자라났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에도 한 그루의 작은 나무가 자라나면서 서로가 이 시간을 함께 나누고, 미래를 함께 그려 나가는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 시대를 겪으면서 꿈과 이상, 그리고 여유를 잃어가는 현대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지키지 못한 채 지나가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누군가와의 시간을 약속하게 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마지막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마음을 찾아 피어오르는 늑대의 이야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흰 사슴의 이야기, 소중한 이를 가슴으로 품을 줄 아는 녹색 곰의 이야기 등 문경아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온전한 스토리가 되겠지만, 이 공간에서 관객의 마음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호흡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져 간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작품 속 또 하나의 존재가 되어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며, 스스로의 인간성 또한 회복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평 론. 조 영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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